『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책 세계의 빌 브라이슨’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큼 인정받는 영국의 희귀본 거래업자 릭 게코스키가 희귀 초판본 거래 시장의 에피소드와 19~20세기 영미문학 걸작의 발간 과정을 담은 책이다.
미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제임스 콘래드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던 그는 초판본 거래 시장에 뛰어들었고, 기존의 거래 방식과 달리 자신의 연구 주제이던 현대 영미문학의 고전 초판본을 주 영역으로 삼아 뛰어난 사업 수완과 깊은 문학적 소양으로 바탕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기까지의 20여 년 희귀본 수집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톨킨의 『호빗』, J.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등 현대 영미문학의 고전으로 꼽히는 작품 20편의 발간 과정과 초판본 거래에 얽힌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놓고 있다. 희귀본 거래시장과 위대한 작가들의 풋내기 시절을 흥미롭게 풀어놓고 있는 책이다. 초판본 수집이라는 또 하나의 책 세계 지금 한국 출판계의 화두는 도서정가제이다. 그런데 이와는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정가보다 두 배, 세 배, 심지어 십여만 배로 뛰어오르기만 하는 책의 세계가 있다. 바로 희귀본 거래시장이다. 우리에게 희귀본이란 훈민정음 해례본처럼 수백 년이 넘는 고문헌으로만 각인되어 있지만, 이 책의 저자 게코스키가 활동하는 영국에서는 현대의 ‘초판본’도 중요 목록을 차지한다.
책의 세계는 주로 절대 다수의 일반 독자와 소수의 작가, 그리고 인쇄업자와 출판업자, 서적상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비록 극소수이긴 하지만 책의 세계에는 희귀본 거래업자들도 엄연한 자리를 차지한다. 책을 숭배하다 못해 발품을 팔아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이 있거니와, 희귀본 거래업자는 이 수집가들을 매개하는 중개상이다. 물론 수집과 거래를 겸하는 사람도 상당수가 된다.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은밀한 열정(secret passion)’ 혹은 ‘점잖은 광기(gentle madness)’에 사로잡힌 이런 사람들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잘 알려진 『젠틀 매드니스』가 사재를 털어 책을 수집하여 개인 컬렉션을 구축하는 과정을 보여 주였다면,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책의 거래를 중심으로 하여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이 책은 또한 9천 파운드(1,700만 원)짜리 『롤리타』 초판본을 생일 선물로 주고받는 사람은 팝음악 작사가, 톨킨을 숭배한 나머지 톨킨의 초판본도 아니고 톨킨이 걸치던 낡은 대학 가운을 구입하여 애지중지하는 어느 대학 강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200만 달러가 넘는 가격으로 『길 위에서』 원고 뭉치를 구입하고도 스스로 ‘임시 관리자’일 뿐이라며 순회 전시회를 기획한 미식축구 구단주의 이야기 등 우리에게는 낯선 수집의 문화도 엿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문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수필가 박연구 씨는 한 고서점에서 우연히 “기껏 판지로나 쓰이고 있는 마분지로 된 수필집”인 이태준의 『무서록』을 발견하고 책의 저자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잃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를 고심한 끝에 물경 쌀 한 가마니 값을 치르고 그 책을 구입하고 나서 “무슨 보물이나 되는 것처럼 감싸 안고 그 집을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분명 『아주 특별한 책들의 이력서』는 한국 근현대 문학의 고전들, 가령 이광수의 『무정』이나 이인직의 『혈의 누』 초판본에게 우리가 어떤 대접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우리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희귀본 거래시장은 이미 세계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북페어나 런던 북페어가 신간 출판물을 거래하는 거대 규모의 국제전시회라는 점을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국제희귀본거래업협회(International League of Antiquarian Booksellers, http://www.ilab.org/ index.php)가 격년제로 주최하는 희귀본 북페어가 벌써 16차까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제16회 희귀본 북페어는 바로 며칠 전인 2007년 12월 7일부터 9일까지 벨기에 미셀렌에서 개최되었다). 일본,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 미국 등 내로라하는 문화강국들은 2008년에도 개별적인 전시회를 열 예정인데, 그 전통이 대부분 20년이 넘는다. 이런 희귀본 시장은 수집가를 위한 거래의 장일 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이 고서와 고전 출판물을 전시물로 접할 수 있는 귀중한 문화체험장이 된다.
희귀본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 게코스키와 같은 보물 사냥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가치 있는 책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저자가 현대의 발간물을 취급하면서도 영미 문학의 고전에 주력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 점에서 우표수집과 책 수집은 차이가 있다.
둘째, 같은 값이면 초판본이어야 하되, 작가의 친필 서명과 헌사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나비 수집에 취미가 있던 나보코프가 그레이엄 그린에게 보내는 헌사와 함께 나비 그림을 그려 넣은 『롤리타』 초판본이 희귀본의 대명사가 된 까닭이 그렇다,
셋째 책 자체가 예술적 오브제로서의 가치를 담아야 한다. T. S. 엘리어트의 작품 목록에서 그다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편인 『시들(Poem』은 시인의 서명이 없는데도 1만 파운드에 팔렸다. 이는 이 시집의 북 디자인이 예술품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을 인쇄하고 제본한 사람이 바로 버지니아 울프였음에야! 또 ‘아라비아 로렌스’(T. E. 로렌스)의 『지혜의 일곱 기둥』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도 내용보다는 호화 장정이 워낙 돋보이기 때문이라고 한다(게코스키의 말을 빌리면 ‘내용에 대한 형식의 승리’).
마지막으로 책이 발간될 당시의 겉표지(dustwrapper)까지 온전히 갖춰야 한다. 20세기 중반까지 영미 독자들은 양장 겉표지를 불필요한 덤으로 생각하여 벗겨 버리기 일쑤였기 때문에 오늘날 겉표지를 갖춘 책이 귀해졌다. 그리하여 때로는 본 책보다 겉표지가 더 비싸게 거래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국 출판계에서는 양장 겉표지 위에 홍보 문구와 저자 사진을 넣은 ‘띠지’를 다시 두르는 경우가 많은데, 수집가의 입장에서는 이 띠지를 어떻게 처치할지 궁금해진다.
책은 모두 저마다 ‘그 책’만의 이력서를 갖는다 게코스키가 다루는 책들은 우연치 않게 우리나라에서도 ‘고전’ 혹은 ‘추천 도서’로 꼽히는 것들이다. 학교의 독서목록은 딱딱하고 위압적인 풍채를 자랑하지만, 이 책은 한껏 인간적이고 경쾌한 면모로 이야기를 풀고 있다. 그 이유는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처음, 첫 책’이기 때문이다.
신참내기 작가와 시인들은 출판사 문을 수도 없이 두르려도 번번이 퇴짜를 맞고(윌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은 스물세 번째 출판사를 만나고 나서야 발간될 수 있었다!), 편집자가 요구하는 대로 고치고 또 고쳐도 기약이 없어 『길 위에서』처럼 탈고에서 출간까지 6년의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시대를 앞서는 내용 때문에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하거나(『1984년』), 외설 시비로 재판을 받고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한다(『롤리타』, 『율리시즈』). 우여곡절 끝에 첫 책이 나오긴 하지만, 기껏해야 1,500부, 심지어 500부(『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로 발간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특집 문학지를 헌정 받았지만 작가의 이름이 엉뚱하게 표기되는 사고(헤밍웨이)도 생긴다.
게코스키는 이와 같은 에피소드를 웃음과 눈물로 전달해준다. 가령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즐겁게 독파’하기는 거의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율리시즈』가 세상에 태어나기까지의 내력은 드라마틱하기 짝이 없다. 문제작 『롤리타』을 읽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함이 필요하겠지만, 저자 나보코프가 나비 그림까지 그려 헌정한 그 유명한 파리 올랭피아 초판본 앞에서 그레이엄 그린과 게코스키가 보드카 한두 잔으로 흥정을 끝내버리는 장면은 한판의 재담을 구경하는 마음으로 넘기기 충분하다. 1950년대 미국 비트 문화의 선구 역할을 한 잭 캐루액의 『길 위에서』는 무려 120피트 길이의 두루마리 원고뭉치로 더욱 유명하다(노먼 메일러는 이 뭉치를 보고 캐루액이 소설가가 아니라 행위예술가라고 말했다). 이 길고 거추장스러운 원고뭉치를 들고 6년 동안 헤매다 겨우 출판한 책이 미국 문화를 바꿔버린 것이다. 책은 또한 가슴 저린 탄식도 안겨준다. 미국판 『돈키호테』라 할 『바보들의 연합(The Confederation of Dunces)』은 출판사의 요구에 따라 고치고 또 고치기를 2년을 거듭하다가 좌절한 저자의 자살을 불러온 작품이다. 아들의 유고를 들고 출판사와 평론가의 문전을 전전한 어머니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 저주받은 걸작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작품의 제목은 천재가 등장하면 세상의 바보들이 연합전선을 펼친다는 조너던 스위프트의 경구에서 따온 것인데, 저자인 존 케네디 툴의 불운한 삶과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밖에도 영문학사상 천재로 꼽히던 오스카 와일드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처럼 비극으로 인생을 마감한 이야기, 헤밍웨이의 데뷔 작품집인 『세 편의 단편과 열 편의 시』가 55페이지짜리밖에 채우지 못한 까닭이 그려져 있다.
데뷔는 언제나 어렵다. 훗날 위대한 작가 반열에 오르는 이들도 처음에는 데뷔의 고통에 전전긍긍하던 풋내기였다. 그러니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 이 풋내기 작가의 첫 책, 그것도 초판본을 보노라면 제본, 표지, 서체, 광고 문구 등 모든 것이 기념될 만하다. 책 수집가들이 초판본에 집착하는 이유, 소더비 경매장에 『롤리타』가 나왔을 때 모두들 숨죽여 결과를 지켜본 것 [예스24 제공]
그리고 작가 릭 게코스키 |